기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13)

대현마당쇠 2006. 12. 24. 15:16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본능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본능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습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 만물들은 본능에 충실하여 본능을 따라 행동합니다. 그 본능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태어나서 자기 먹을 것을 구해다가 먹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새끼를 낳아 번식을 하고 죽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능을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존귀하다는 이유입니다. 본능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먹고 싶으면 훔쳐서라도 먹고, 자고 싶으면 아무 데나 엎어져서 자고,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사랑한다고 매달립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조금이라도 지체하거나 거칠 것이 없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능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다 왜?”

  이처럼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본능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들과 같이 본능적인 성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능을 참을 수 있거나 뒤로 연기시킬 수가 있습니다. 본능을 선한 방법으로 발전시킨다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충족시키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능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것이 인간 스스로 가능하다는 것과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중립적이지 않고 바르게 펴지 못할 정도로 비뚤어져 있고 때가 많이 묻어있다는 가르칩니다. 모든 자연인은 누구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조금 심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예수 안 믿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순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모든 일들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훈장을 받고 칭찬을 받을만한 내용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게 된 동기와 능력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잘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말씀에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우리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내 맘이다 왜?”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화가 나는 일도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싸우는 것을 보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남의 일에 간섭이냐?”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은 큰 일 날 소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한 가족이고 언젠가는 천국이라고 하는 한 집에서 영원히 같이 살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 맘 대로 살아도 될 사람들이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 될 사람들이고 내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행동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많지만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모라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고 어떤 옷과 신발을 신었느냐 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과 환경을 다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재산, 성격, 가족, 고향, 건강, 학력, 직업, 말 재주, 살아온 과거 등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외모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여러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얼마짜리의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워놓고 1등은 1등의 대접을 해주고 꼴찌는 꼴찌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1등이 되라고 하고 앞줄에 속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은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시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딴 세상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그 누구나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 차별이 없는 곳입니다. 더 있다고 더 주는 것도 없고 덜 있다고 덜 받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더 있는 사람이 더 받으려니 하고 기대를 하고 오면 더 주는 것이 없어서 섭섭해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알아주겠나 하고 주저하면서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잘 대접하고 섬김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올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기도 하지만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어야 교회의 교회됨이 가능하고 성도의 성도됨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교회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있으면 교회의 교회됨이 깨어져서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을 두고 “악하다, 죄를 짓는 일이다”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고 있고 9절에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는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율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정죄하지 못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외모로 하나님이 나를 취하셨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달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잘 나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떻게 나 같은 것을 다 구원해 주십니까, 나 같이 못난 사람을, 벌레만도 못한 나,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차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행동으로 이미 나는 율법으로 구원을 받았소, 나는 남들보다 잘 나서 구원 받았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런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도도 아니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교회도 아닙니다. 이 정도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을 무서워해야 하고 멀리 해야 마땅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가난한 사람을 가난하다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맞서 싸워서 이긴 사람도 없지만 잘 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믿음의 부유한 복을 마음껏 누리고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외모로 보면 가난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이후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믿음의 부자입니다.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라 부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라, 믿음의 부자라, 억만 장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천국의 상속자라 불러야 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고 하나님이 존귀하게 높이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고, 차별하고, 무시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성도라고, 교회라고 하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하나님 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우리도 좋은 것이고 하나님이 싫다고 하면 우리도 같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다는 사람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높인 사람은 낮추고 깎아내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하나님을 맞서는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이제 마지막 심판이 남았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심판은 나에게 없네, 그의 피 내 죄 사하네,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으니 심판은 나에게 없네.” 안 믿는 사람들은 행한 대로,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들에게는 심판은 없습니다. 성경의 여러 군데를 보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율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라는 말 앞뒤에 반드시 다른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율법 그대로가 아니라 뭔가 변화가 일어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모든 권세가 해제 된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도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율법인데 어떤 율법입니까? 자유의 율법입니다. 자유의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어지는 13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이 있는 심판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긍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봐주는 것입니다. 하는 짓대로 다 갋다가는 뼈도 못 추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철저하게 계산하겠다고 하시면 우리 모두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봐주고 또 봐주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못된 짓, 우리가 망하게 된 처지와 형편을 보시고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외모로 다른 사람을 취하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사람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하나도 감하지 않고 고스란히 자기 머리 위에 쏟아지게 하고 싶은 사람은 외모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무시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생긴 대로, 저지른 대로, 가진 대로 일일이 다 갋지 않으시고 봐주고 또 봐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봐주고 또 봐주는 것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대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외적인 데 있지 않고 내적인 데 있습니다. 신앙적인 본질과 중심을 따라 바른 사고방식과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오늘 말씀드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교회라고 한다면, 여기가 세상과는 다른 곳이라고 한다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일이 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능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좋아하는 사람, 덜 좋아하는 사람 구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만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 받을만한 사람만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하고 죄인들도 그 정도는 누구나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짐승들도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할 줄 안다고 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긍휼의 마음만 있으면 구별하고 판단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비뚤어진 눈을 충분히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외모로 사람이 보이는 것을 어떡하나? 더 마음에 땡기는 사람이 있고 덜 땡기는 사람이 솔직하게 있는 것을 어떡하나?” 하면서 반문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만의 생각이 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과 판단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 내어놓지 마시고 그것을 없애든지, 좋은 것으로 걸러서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단 마음에 그런 생각이 금방 떠오르더라도 그 마음 그대로 입 밖으로 내어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그냥 두지 마시고 내가 이런 자세, 이런 마음을 계속 품고 있으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성도라 말할 수 없다,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속히 이런 생각을 지워버려야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차별이 없는 세상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올 자리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오기를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 때로는 교회라고 하면서 세상보다 더 심하게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데 그런 교회에 누가 오고 싶겠습니까? 사람이 올 자리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차별이 없이 구원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차별 없는 교회를 만들어놓아야 사람들이 누구나 올 수 있고 거기서 세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안식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다시 쫓아내 보내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힘들게 전도해서 겨우 한 사람 교회 나오게 되었는데 사람 차별하는 날카로운 말 한 마디 해서 순간적으로 쫓아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누구나 편하게 자리할 수 있는 자리 하나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차별하고 상처 주는 말 제발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리 하나 만들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렇게 만든 자리 하나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라는 말이요 세상을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교회라는 말이며 장차 천국의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단체라는 것 밖에 될 수 없습니다.

  교회 나왔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교회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때문에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8,90% 이상의 사람들이 다 먼저 믿는다는 우리들 때문에 상처 받아 교회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